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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3탄 [쇼펜하우어 소품집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by solsoljihye 2024. 6. 8.

쇼펜하우어 세 번째 글이다.
에리히 프롬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에 대한 책을 세 번째 읽게 되면 그래도 '아 이다음에 이런 이야기를 하겠구나'하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직접 만나는 지인이나 친구에 대해서도 알면 알수록 그 사람의 줄기 된 생각을 알게 되어 그 사람의 맥락을 파악하게 되는 것처럼, 한 작가에 대한 세 번째 글은 내가 이 글에 대해 잘 이해한 게 맞고,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그 중심을 안 게 맞는지 확인하게 되는 경험인 듯하다.
[쇼펜하우어 소품집,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는 번역 자체가 매끄럽지 않은 느낌이지만, 그만큼 더 와닿는 내용들이 많아 발췌하는 식으로 감상을 쓰려고 한다. 2탄의 내용들이 더 상세히, 마음에 울림을 주는 문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책 1,2,3탄의 책 중 추천을 한다면 이 책을 제일 권하고 싶다. 아래 내용은 [쇼펜하우어 소품집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라]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1. 외로움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드는 요인은 인간이 외로움과 외로운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을 사교모임, 외국여행으로 몰아가는 주체는 내면의 공허감과 권태감이다. 이런 인간의 정신에는 스스로 움직일만한 원동력이 없다. 그래서 그는 포도주라도 마시면서 기운을 끌어올리려다가 그냥 술고래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외부로부터 자극, 자신과 같은 부류에서 오는 매우 강력한 자극이 필요하다. 이 자극이 없으면 그의 정신은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을 짓누르는 무기력증에 빠진다.
 
알려진 대로 재앙은 여럿이 견디면 수월하다.
사람들은 지루함을 재앙의 한 종류로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여럿이 모여 다 같이 지루해지려 한다.
인간의 군집본능은 직접적으로 사교모임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인간은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호의 넘치는 소통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자기의식의 단조로움과 혼자라는 지루함과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질 나쁜 사교모임에도 만족하고 그런 모임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번거로운 일이나 압박도 단념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한 혐오감이 커져 모든 것을 압도하면 외로움이 습관이 되고 그 외로움의 즉각적 인상에 단련되어 앞서 설명한 상황이 더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언제나 혼자 있을 수 있고 사교모임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사교성은 몹시 추운 날 사람이 집결하여 체온을 유지하듯 인간이 서로 모여 정신적인 온기를 나누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신적인 온기가 충분한 사람은 그렇게 모일 필요가 없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모와 형제, 공동체에 둘러싸이기 때문에 외로움이 자연스럽지 않다. 그 결과 외로움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연적인 성향으로 존재하지 않고 경험과 성찰을 통해 발생한다. 이 마음은 정신력이 발달할수록 생기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기기도 한다.
 
 

2. 본래 인간이 소유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각자의 개성에 근거하여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한도가 정해져 있다. 특히 정신력의 한계는 높은 수준의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지점을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정신력의 한계성이 낮으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외부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까지 다다를 힘이 없다. 이런 인간은 반쯤은 동물적 감각에 따른 행복과 즐거움을 넘어선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인간은 감각적 쾌락, 친밀하고 밝은 가족관계, 저급한 사교모임 또는 통속적인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그친다. 심지어 교양을 갖춘다 해도 한계영역을 다소 넓힐 수 있을 뿐 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지속해서 다양하게 깊은 만족을 느끼는 일이 중요한데 깊은 만족감은 정신력이 좌우한다. 정신력을 보면 행복이 우리의 본질, 즉 인격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 확실해진다. 
 따라서 본래 인간이 소유한 것이 행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것이 아주 적은 탓에 대다수 사람들은 곤궁함을 이겨내고도 궁핍한 자들과 똑같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공허한 내면, 무미건조한 의식, 빈곤한 정신이 인간을 끼리끼리 모이도록 만든다. 내면이 가난하면 외부에서 뭐든 받아들여 내면의 부를 외적인 부로 대신하려고 하는데, 그 노력은 부질없다.
이는 마치 노인이 소녀의 기력을 빌려 젊어지려는 노력과 비슷하다.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남이 줄 수 있는 것도 매우 좁은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인간은 모두 홀로 있으므로 그 홀로 된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에게 줘야 한다.
 
평범한 인간은 특히 인생의 향락에 관해서는 자기 외부에 있는 것 즉 재산, 지위, 부인과 자식, 친구, 사교모임 등에 기댄다. 이것들이 자기 인생의 행복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외부의 것을 잃거나 그것들에 기만당했다고 느끼면 절망한다. 이런 관계에서는 무게 중심이 인간의 외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극히 적은 부류의 천재들이 아무리 좋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도 상당수 사람이 보이는 친구, 가족, 공동체에 대한 진심 어리고 무한한 동질감을 나타내지 않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을 올곧게 유지하는 일이 가장 큰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의 내면에는 타인보다 고립적 요소가 더 들어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결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언제나 타인과는 이질적인 존재로 인지하며 타인과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3. 나의 삶, 나의 태도

  다른 사람을 자기 행동의 본보기로 삼아선 안된다. 타인과 처지, 상황, 관계가 동등하지 않고  품성의 차이가 행동에 다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할 때도 그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충분한 고찰과 예리한 숙고를 거쳐 자기 성품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독착성이 없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하는 일과 인간은 원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은 현실을 항상 쾌활하게 받아들여 존중해야 한다. 그러니 직접적인 불쾌감이나 고통 없이 견딜만한 자유시간에는 매 순간 의식적으로 즐겨야 한다. 이 말은 곧 과거의 희망이 좌절되었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우울해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